【산티아고=AP/뉴시스】칠레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10일(현지시간) 향년 91세를 일기로 입원 중이던 산티아고의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피노체트를 진료했던 산티아고 군병원 의료팀의 대변인인 후안 이그나시오 베르가라 박사는 피노체트가 이날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티아고 군병원 병실에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피노체트는 지난 3일 심장 발작 증세를 보인 후 산티아고 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피노체트 사망에 대한 칠레 국민들의 반응은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산티아고 군병원 앞에서 피노체트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한 반면 반(反)피노체트 성향의 칠레 시민들은 산티아고 곳곳에서 욕설과 함께 피노체트의 사망을 반겼다.
집권 시절 피노체트가 저지른 인권 범죄에 대해 소송을 진행 중인 칠레 인권 변호사 우고 구티에레스는 피노체트가 아무런 법적 처벌도 받지 않고 세상을 뜬 데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구티에레스 변호사는 "범죄자가 독재 시절 저지른 범죄와 관련, 단 한 차례도 선고를 받지 않고 떠났다"며 그를 법정에 세우지 못한 것을 탄식했다.
독재 희생자 유족협회의 회장 로레나 피사로도 학살범 피노체트가 '세계 인권의 날'인 이날 숨진 것은 역설적인 일이라며 그가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숨진 데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반면 피노체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측은 그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며 애도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피노체트는 1973~1990년 재임 시절 최소 3197명을 정치적 이유로 숙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피노체트는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 수백건의 범죄 혐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정신상, 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워 회피해왔다.
불가능해만 보이던 피노체트의 처벌은 피노체트가 지난달 91세 생일을 맞아 재임 시절 발생한 모든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밝히면서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피노체트는 부인이 대독한 성명을 통해 과거의 모든 잘못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뜻을 전했다. 물론 이 성명에서도 피노체트는 인권범죄와 관련한 사항은 끝내 언급하지 않았다.
항구도시 발파라이소에서 1915년 11월25일 세리(稅吏)의 아들로 태어난 피노체트는 군대에서 자신의 역량을 키워갔다. 1973년 쿠데타 발생 불과 19일 전 당시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로부터 군 총사령관으로 지명된 피노체트는 이어진 쿠데타를 통해 아옌데를 축출하고 권좌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트럭 운전자 파업 등을 지원, 칠레 내 불안을 조장, 쿠데타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미국 정부는 이같은 의혹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피노체트는 집권 직후 무력을 동원, 대규모 좌파 숙청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군대는 수고 산티아고에 진군, 수많은 좌파 인사를 체포함으로써 공포정치 분위기를 조장했다.
피노체트는 이어 의회를 해산한 후 좌파 숙청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했다. 이 와중에 최소 3197명이 군부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으며 수천명이 체포 또는 추방됐다.
피노체트는 또 강력한 자유시장경제정책과 과도한 차관 도입, 인위적인 페소화 평가절상 등을 통해 칠레 경제를 한때 파탄 지경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기초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된 이같은 무리한 경제정책은 재정 붕괴와 전례없는 실업률 등의 문제를 야기했으며 이 때문에 1980년대 초 칠레 경제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결과적으로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유학한 '시카고 보이즈'로 불리는 시카고 학파 내 젊은 경제학자들이 주창한 경제정책 변화를 수용, 1980년대 중반 경기회복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앞선 시기 칠레는 국가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피노체트는 독재를 이어가려 했지만 남미 내 시민의식 성장은 피노체트의 장기집권 야욕을 앞질렀다. 그는 1988년 10월5일 자신의 집권기간을 1997년까지 연장하기 위해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패배, 최초이자 최후의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이후 그는 국민들의 거센 대통령선거 요구에 굴복, 대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1990년 3월 실시된 대선에서 피노체트는 중도좌파연합의 파트리시오 아일윈 후보에게 패배,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후 8년 동안 군 총사령관으로 변함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는 또 군 사령관에서 물러난 뒤에도 종신직 상원의원직에 오른다.
그의 영향력이 현재와 같이 쇠퇴한 것은 1990년대 말이다. 1998년 등 수술을 위해 영국을 찾은 피노체트는 그곳에서 인권 범죄 혐의와 관련, 가택 연금 명령을 받는다. 이에 영국 정부는 피노체트를 법정에 세우지 않기 위해 그의 건강을 문제 삼아 2000년 3월 그를 본국으로 송환시킨다.
하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가 돼 돌아온 조국에서는 더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개가 넘는 혐의가 그에게 제기됐다.
하지만 그는 끝내 법정에는 서진 않았다. 2001년 9월 칠레 법정은 그의 열악한 심신 상태를 이유로 그를 법정에 세우지 않았으며 2004년에도 비슷한 이유로 그의 재판은 중단됐다.
엄성원기자 swum@newsis.com
엄성원(기자)





